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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양학 읽기] 3. 고전을 다시 읽자 [중앙일보]

하늘위땅 2011. 6. 18. 09:43

[동양학 읽기] 3. 고전을 다시 읽자 [중앙일보]
 
 
한자가 일상어가 아니게 되고, 더욱이 한글 전용 교육을 받아온 사십대 이전의 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으로 성장한 오늘날 우리는 위대한 정신적 유산과 학문의 대부분을 가까이하지 못 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려 해도, 철학을 배우려고 해도 우리 것에선 한자라는 장벽에 부딪히고 남의 것은 영어라는 절벽에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다.
 
한글로만 되어 있는 우리의 것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한자로 된 우리 것을 버린 것은 우매한 일이다. 어떤 것을 수백년만 썼어도 그것은 '우리 것' 이지 '남의 것' 이 아니다. 하물며 수천년 써 온 문자를 '남의 것' 이라 하다니!
 
그 바람에 우리 학문의 역사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이 돼버리고 말았다. 우리 학문이 시작된 것은 불과 50년 전이다. 그 전에도 학문이 있었고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 말하지 말라. 어디에 있는??성균관에 있다고? 해인사에 있다고? 우리가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고대의 문자가 적힌 종이와 목판의 더미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다. 우리는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읽어야 한다. 고전은 원전을 그대로 읽어야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참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이다.
 
한문 읽기는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뒤지면 된다. 문제는 독법인데 한자 자체는 모양이 복잡하고 뜻이 다양하지만 서술 방식이나 문법은 조악하다 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런 한문을 읽고 우리말로 뜻을 옮기는 데 수천 년에 걸친 학문이 동원되어야 하고 수십 년의 연구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나는 웃을 뿐이다. 공자가 어떤 말을 한 배경이나 말에 숨겨놓은 저의를 밝힌다든지 혹은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후사정을 고찰하여 해설을 하고자 하면 공자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논어가 나온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지식도 필요하고 동시대의 관련 문헌들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자나 노자가 한 말을 말 그대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 해서 번역 자체를 원문과 다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
' 이란 문장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이 문장을 문법에 맞게 우리말로 옮기면 '누가 능히 고요함으로써 탁한 것을 천천히 맑게 할 수 있겠느냐□' 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즉 해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맑은 것은 쉽게 탁하게 할 수 있지만 탁한 것은 쉽게 맑게 하지 못한다' 는 말의 반어법적 표현인 것이다. 이 원문은 이런 번역 말고는 어떤 다른 것도 나올 수가 없는 문장이다. 만약에 다른 번역이 나온다면 그건 한문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도올이나 여타의 번역들은 전혀 엉뚱하다.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 가 도올의 번역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원문에 '자기를 흐리게 만든다' 는 내용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더러움을 가라앉힌다' 는 말도 안 나온다. 있는지 한번 찾아 보라. 그걸 찾는 사람은 내가 삼천배를 하고 평생 스승님으로 모시겠다.
 
"저 원문에 나오는 탁(濁)
이라는 것은 내 생각에 자신을 흐리게 만든다는 뜻인 것 같다" 또는 "고요함으로써(以靜)
, 천천히 맑게 한다(徐淸)
' 는 말이니까 '탁한 물을 가라앉혀 깨끗이 한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라고 '해설' 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 자체는 원문 그대로 해주고 나서 그런 해설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전 주석서가 원문의 번역이라고 붙여 놓은 것인지, 역자의 해석인지 두 가지가 섞인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원문의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원문과 너무 다르고, 해석인가 싶으면 그 밑에 해석은 별도로 나온다.
 
아무리 의역을 하더라도 원문과 동떨어진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원문과 완전히 반대되는 소리를 번역이라고 해 놓은 것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도덕경의 경우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다.
 
고전이 비록 고대에 한자로 씌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해석이 구구할 수 있고 또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관련된 지식들도 필요하겠지만 번역 자체는 그런 것들이 필요없다. 오히려 그런 지식들이 번역이 아닌 창작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주변 지식은 해석에 써먹을 일이고, 번역은 원문을 똑바로 보고 한문의 독법에 맞추어 정확하게 해야 한다. 정확한 원문 그대로의 번역을 해놓고 해석은 그것을 가지고 할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전 연구가들이 아예 번역의 단계에서부터 자신의 지식과 선입관을 개입시켜 추측에 의한 창작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번역은 한 가지뿐이다. 그 한가지를 똑바로 하면서 시작해야 동양학이 제대로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은 한자가 자기들 문자인데 왜 중국사람들도 고전의 뜻을 몰랐느냐□' 고 묻는다. 한자로 쓰여진 고전에 관한 한 번역의 문제는 한국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자라는 글자를 한국말로 옮기나 중국말로 옮기나 똑같은 성격의 번역이다. 뜻글자를 소리로 옮긴다는 점에서는 하등 차이가 없다.
 
명대(明代)
에 백화체(白話體)
라는 구어체 기록법이 생긴 이래로 한자를 뜻과는 상관없는 발음 기호처럼 쓰는 것은 오늘날의 중국인이나 명나라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백화체 이전의 고전에 관한 한 그것을 구어로 옮기는 번역은 그들이 우리보다 쉬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한자라는 글자에 익숙하기는 하겠지만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기는 표음문자의 보조를 받는 점에서는 동양 삼국 중 중국이 가장 불리하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표음문자인 한글을 가진 우리가 가장 유리하고, 다음이 가나라도 갖고 있는 일본이며, 원래가 표의문자인 한자를 가지고 신라시대 이두식 표기를 하는 중국이 가장 불리한 것이다.
 
때문에 동양학에 관한 한 삼국 중 우리가 가장 앞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전을 번역하는 데 일본을 쳐다보고 중국에 기대한다는 것이 될 말인??동양 고전의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과 이해는 한국에서 나와야 하고, 일본과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워가는 것이 정상이고 순리다.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저자

출처 : 벽운공
글쓴이 : 겨자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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