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여사의 제3의 활동/절 집 기행

드라마틱한 길을 올라보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자리에 절 집이- 완주 불명산 화암사

하늘위땅 2013. 3. 10. 16:00


거의 대부분 이 절 집을 아는 사람들은 혼자만 가고 싶은 곳이라고 말하네요.

책을 봐도 정말 혼자 호젓하게 가서 머물다 오고 싶은 절 집이랍니다.

이용재 선생님


'화암사.

나무 위에 핀 꽃.

규모가 작아 아름다운 절.

없는 것이 많아 아름다운 절.

웅장한 맛은 없고 투박해서 아름다운 절'



이라고 하셨지요.

글로 읽고 사진으로 보고 혼자 상상을 엄청시리 많이 했더랍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다들 혼자만 알고 싶다고 하는 건지.


국보건축물 23선 찾아 보는 길이니 맘 먹고 전주에서 찾아갑니다

네비를 찍어보니 한옥마을에서 1시간 넘게 걸린다고 나옵니다


쌩하니 달려서 그 곳으로 갑니다




[출처] 완주 화암사|작성자 이용재


[출처] 완주 화암사|작성자 이용재





지난번 늦은 오후 해질무렵 이 입구에서 돌아가버려 넘 아쉬웠는데 빠른 시간에 다시 찾게 되어 어찌나 기쁜지.

동행했던 친구들에게 들뜬 맘을 보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답니다.


"흔한 절 집이 뭔데 그리 가보려고 애를 써누"


라고 할까봐 .


이날은 엄청 따뜻했습니다

완주가 29도 가까이 기록했다는 뉴스를 봤거던요.


미리 옷을 맞춰 입고 나섰건만  몇발 걷지 않아도 땀이 납니다.





흔히 그리고 일반적으로 아는 바대로 입구에서 평탄한 길을 2~30분 걸어 가면 절 집이 나오지 않을까 단순하게

짐작을 했기에 굽이 있는 신발을 오랜만에 신고 나선 길입니다.


그런데...






넓은 산길이 이내 좁고 작은 계곡을 타고 오릅니다.

온통 바위와 돌 너덜길입니다.

작은 계곡엔 얼음이 녹은 물이 찰랑거리며 봄 볕이라기엔 조금 더 뜨거운 햇빛을 안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바람이 작고 좁은 계곡으로 몰아칩니다.

머리 마구 헝클어지고 난립니다.





김봉렬 선생님이 아쉬워했었던 그 계단이군요

하지만 저 계단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급경사 좁은 길을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바람이 너무 불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고 그냥 날려가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응달엔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겨울이 용을 쓰고 있구나 알게 해주기도 하네요.





"옴마야 너거들은 머하고 안오고 ㅋㅋ"


초등학교 동창끼리 부부가 된 친구들은 헉헉 거리면서 이 나즈마한 경사길도 힘들어 하네요


"친구야 힘내라 그래가꼬 되나 ㅋ"







계단을 다 오르니 떠억허니 눈길을 사로잡는 이것은..


안도현님의 시군요



화암사 내사랑.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채


그 절집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은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시를 한순배 다 읽고 음미를 하니 그저서야 얼굴을 뵈는 우리 친구들입니다.


"어여 온나"


화암사 중차비에는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마리 말을 갈무리할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라고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용재님 글에선 이 철재다리가 1983년 완주군수가 이 바위타고 가는 벼랑길에서 넘어져서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왠 철재계단인가 했구만요 ^^





바위의 이끼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요염한 바람은 또 불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버립니다.





오 보이네요 절집이.

그리 많은 시간을 걷지는 않았는데 한참을 올라온 느낌이네요.






아이고 우화루다!


저절로 말이 나옵니다.

말을 좀 쭈라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때문에 과하게 말을 하게 된 날입니다.


우화루를 보니 또 말이 저절로 술술 나옵니다.

부처님이 성불하실때 꽃비가 내렸다죠 그래서 우화루라는 이름은 많이 있답니다.


소박합니다.


신기한건 누각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옆의 작은 문으로 절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거.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도 아름다운 절이라는 말이 정말 쏙 들어오는 절입니다.





안동 봉정사 영산암에도 우화루가 있었는데 아직 그곳도 눈에 담질 못해서.


황원호 소박한 축대와 어울리게 각재 서까래의 홑처마, 외삼출목의 과하지않은 공포, 미니멀한 느낌을 주는 기둥과 문틀...


무식한 제눈에도 예술이네요...예술....근데 원래 저렇게 만들었을까요? 문살없이...



페이스북 친구분이 이런 의문을 올렸는데 저도 모르겠네요

원래 문이 저랬는지 어쨌는지..




드디어 봅니다.

우리 국보 건축물 중 최근에 지정된 극락전입니다.

국내 유일의 하앙식구조라고 합니다.


하앙식구조는 처마 무게를 받치는 건축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해 지렛대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더 길게 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흔히 사용됐으나 국내에서는 완주 화암사 극락전만 실물로 남아 있어서 국보로 지정이 되었다고 하네요.





원래 단청이 없었던 것인지 지워진 것인지...

그런데 이런 나무색이 자연스럽고 더 좋습니다.





아주 작은 절 집입니다.

네모난 하늘이 절 집 하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붕이 네각을 만들어 네모난 하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곳은 요사체 '적묵당' 입니다.

말없이 참선하는 집이라는 뜻이랍니다.


아저씨들이 왔다갔다 하시면서 문 수리며 절 집 곳곳을 수리를 하고 계시네요





마당 한쪽 구석에 우화를 봅니다.

앞쪽에서 피로티구조의 이층 같더만 마당에선 단층입니다.






아...

울 외가집 마당을 보는 듯 그때 그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마당 한켠입니다.

넘 좋으네요






양철지붕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흐흐 뒤깐입니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고 오른쪽에 3층 높이의 뒤깐이 새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래가 뻥 뚫린 화장실

아래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 올라오는 경험을 흐흐흐


뒤편 넓은 장소는 주차장인지 공사차량들이 바쁘게 움직이네요

양철 지붕이 참 정겹네요

어릴적 생각도 나고.


어떻게 보수를 하고 있는 건지...



마음이 괴로울때 누가 일러줘 갔더니 참 좋더라고 하셨던 분이 생각나네요

맞아요

좁고 구부한 길을 사부작 올라 괴로운 마음 잔잔하게 편 뒤 절 집에 서면 얼마나 평온해질까요.





내려오니 커다란 관광버스 한대가 서고 우르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립니다.

음...단체는 좀..


엄청시리 덥덥한 날입니다.






정말 작은 절집입니다.

좁은 계곡을 타고 만난 넓은 땅위에 세워진 화암사입니다.

앞으로 산이 첩첩 겹쳐져 보이네요


찾아 오는 길 네비가 잘 일러주지 않게 불친절한 곳입니다.

좁은 농로를 딱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습니다.

마주오는 차가 있다면 저같은 여전히 초보운전자는 식겁합니다.


버스가 들어오기는 하는 모양인데 버스를 타고 오면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오겠는데 것도 참 운치가 있을 것 같군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듯 혼자 만 알고 싶은 곳이 맞군요

사부작 걸어서 마음 정화하러 오기 좋은 절 집입니다

물론 보물이 있는 아주 아름다운 작은 절 입니다.


[김봉렬 님의 한국건축이야기중 화암사에 관한 글입니다]



아름다운 계곡을 타고 오르면 벼랑이 가로막고 벼랑 사이 한사람이 겨우 오를 정도의 아슬아슬한 길이 바위 끝으로 이어진다. 예전에 다니던 진입로였다. 너무 통행에 힘들어 1983년 옆의 폭포 위로 철제 계단과 다리를 놓았다. 통행에는 편해졌지만, 운치가 없고 경관을 해치고 있다. 이 절도 보존이냐 개발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15세기 때 쓰여진 <화엄사(화암사의 예전이름)중창비>에는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마리 말을 갈무리할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아직도 옛 모습의 흔적은 완연히 남아있다. 힘들게 올라온 끝에 한숨 돌리고 나면, 누각과 그 옆의 대문으로 가로막힌 한무리의 기와집이 나타난다. 정면이 외부에 대해 굳게 닫혀있어서, 사찰이라기 보다는 어느 유력 문중의 재실이나 서원과 같은 인상이다. 화암사는 험한 능선이 갑자기 완만해지면서 만들어진 800여평의 바위 위에 터를 잡았다. 


중심곽은 전면 우화루와 뒤의 극락전, 서쪽의 적묵당과 동쪽의 불명당으로 이루어진 작은 중정이다.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로는 북향을 하고 있는 명부전이 눈에 들어온다. 우화루는 2층의 누각이지만, 아래가 석축으로 막혀있어 출입이 불가능하여 옆의 대문채를 통해 진입해야 하고, 대문을 들어온 후에도 적묵당의 부엌에서 일하는 보살의 감시를 받아가며 우화루 모퉁이를 지나야 중심곽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타의 다른 부분은 건물이나 돌각담으로 막혀있다. 암반 위에 굳게 닫힌 화암사의 외관은 마치 작은 성채를 보는 것과 같다. 신라 때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주장하는 이 절은 서해에서 경주에 이르는 옛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임진란 때 충청도 금산에서 이치대첩(梨峙大捷)의 큰 전과를 거두었때 이곳에까지 병화의 피해가 번져 불타 버렸다. 전쟁 직후인 1604년 서둘러 중창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 절은 순수한 종교시설이라기 보다는 풍수적 관점의 비보용이나 군사적 목적을 띄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성채와 같아 보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적묵당은 뒤쪽으로 두 날개채를 가진 ㄷ자 평면의 승방이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뒷마당(後院)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일반 신도들은 넓은 부엌을 통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건물에는 툇마루가 달려 생활에 더욱 편리하도록 되었고, 마당 앞으로는 자연 암반이 솟아있고, 그 위에 소박한 장독대를 마련했다. 장독대 옆에는 정말 작은 산신각이 ‘얹혀져’ 있다. 절의 서쪽은 암반으로 이루어진 넓은 계곡이고 여기에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 아래 폭포의 원류가 되고 있다. 물줄기 중간에는 지그재그형으로 배열된 5개의 둥근 웅덩이가 파져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 분명한 이 시설물은 경주의 포석정과 같이 물놀이용의 시설이었는지 아니면 현재와 같이 빨래터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히 절묘한 아이디어였다. 화암사는 너무나 깊은 산속에 외로이 있어서, 일반 신도들 보다는 스님네들의 작은 수행공간으로서, 마치 성채나 수도원과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도록 건축되었다. 그러나 화암사 마저도 변형과 파손의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 


산 뒤쪽으로 자동차 길을 만들어 절 위까지 차량이 올라올 수 있도록 했고, 서쪽 암반에 흉한 콘크리트 덩어리 축대를 쌓아 주차장을 조성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승방이나 극락전 우화루를 손대지 않고 있지만, 화암사 건축의 빼어난 점은 건물 뿐 아니라, 주변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 건물만 보존하고 자연을 손댄다면, 화암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괴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화암사 찾아가기


완주에서 경천면까지 가는 버스 이용

전주역이나 모래내시장에서 535번 버스타고 고산으로 

고산터미널에서 운주를 거쳐 화암사까지 가는 시내버스 300번 이용(하루6회)


네비찍고 가면 화암사 표지판이 언뜻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