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머릿속을 채우던 지식들이 공허한 장식처럼 느껴졌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앎, 나를 포장하기 위한 말들. '지적 허영'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갈망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기로.
그렇게 두어 달, 스스로에게 텅 빈 시간을 선물했습니다. 일부러 빈둥거렸습니다. 책장은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두었고, 노트북은 닫아두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처음에는 어색했던 침묵과 무료함이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빼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면서 오히려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글자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도, 하기 싫다는 반항심조차도 희미해졌습니다. 그저 존재하는 시간. 어쩌면 가장 솔직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완벽한 고요는 없었습니다. 너무 오래 잠잠했던 탓일까요.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만 움직여야 하지 않겠니?' 하는 조용한 속삭임. 마치 오랫동안 숨어있던 본연의 무언가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재촉하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마저도 못들은 척, 고개를 저으며 다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직은, 조금 더 이 고요함 속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손에 잡힌 것이 있었습니다. 먼지가 살포시 내려앉은 책 한 권.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멍한 시간을 깨뜨릴 작은 움직임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그토록 외면했던 글자들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스며드는 문장들. 허영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나니, 비로소 글자들이 가진 본연의 의미와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아, 책 속에 길이 있다더니...'
잊고 있었던 그 말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나에게, 책은 조용히 방향을 가리켜주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대로가 아닐지라도, 나만이 걸어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 그 길 위에는 꾸밈없는 지혜와 따스한 위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재촉하던 그 무언가는, 바로 이 길을 찾으라는 신호였을지도 모릅니다. 빈둥거리고 멍하니 보낸 시간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영의 때를 씻어내고, 진정으로 나아갈 길을 발견하기 위한 꼭 필요한 멈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섰습니다. 거창한 목표나 허울 좋은 구호는 없습니다. 다만, 책 속에서 발견한 이 작은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려 합니다. 조용히, 그리고 진실되게. 그렇게 나는, 허영의 먼지를 털어내고, 조용히 책 속의 오솔길을 따라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마음은 더없이 충만하고 따뜻했습니다.
내면 성찰, 일상의 소중함, 시간과 기억, 자연과의 교감, 진정한 길 찾기 – 과 맞닿아 있는 책들입니다.
- 내면 성찰과 진정한 길 찾기 ("지적 허영을 잠재우고...", "결과 너머의 이야기...")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또는 『싯다르타』: 청소년기의 방황과 자아 탐색, 혹은 구도자의 길을 통해 진정한 자아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깊이 있게 그린 고전입니다. 허영을 넘어선 본질적인 길 찾기에 대한 성찰을 던져줍니다.
- 법정 스님 『무소유』: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 발견하는 정신적 풍요와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적 허영을 잠재우고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일상의 소중함과 자연과의 교감 ("햇볕이 좋아보여...", "길가 매화꽃이...")
- 김훈 『자전거 여행』: 작가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만난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유의 단단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일상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포착해냅니다. '햇볕 좋은 날 나선 길'의 감성과 맞닿아 있을 것입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문명에서 벗어나 숲속 호숫가에서 자급자족하며 보낸 2년의 기록입니다. 자연 속에서의 단순한 삶과 깊은 사색을 통해 문명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 본연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매화꽃'에서 봄을 느끼듯,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성찰을 줍니다.
- 시간, 기억, 청춘에 대한 회상 ("꾸준하게 최선을...", "햇볕이 좋아보여...")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기억을 통해 엄마의 삶과 가족 관계, 그리고 흘러간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소설입니다. '어릴 적 순수했던 시간', '푸르른 청춘'에 대한 회상과 같은 아련한 감정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시선으로 탐구합니다. '목적 없이 나선 길'에서 얻는 의외의 발견과 사색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합니다.
감수성과 사색의 결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책이든 마음이 가는 대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책 속에서 또 다른 길과 위안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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