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여사의 제3의 활동/아름다운 내나라 여행

조선왕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세계문화유산 종묘

하늘위땅 2012. 6. 19. 09:06

참 기회가 안됐었다.

늘 지나치고 밀리고 그러나 꼭 한번은 가보리 했던 곳이 종묘.


궁궐 통합관람표를 끊고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또 밀렸던 종묘을 비가 오는 이른 봄 들렀다.

병원 진료시간이 많이 남기도 했고 비가 오니 마땅히 머물곳이 없었기도 해서

그래서 찾았던 것이 사실은 조금 미안했다.


궁궐처럼 아무시간에나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렸는데 

아뿔싸!

작년에 갔던 창덕궁 후원도 시간제 해설사 동반 관람이였는데 그걸 기억 못하다니..

그렇게 40여분을 비를 맞으면 근처 떡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세계문화유산 종묘 조선 왕실의 영혼의 잠자고 있는 곳 

왠지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빗속에 발자국 소리를 재우며 입장을 했다.


매주 토요일은 자유관람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궁궐의 오른쪽에 사직단을 왼쪽에 종묘를 지었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하였고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레 건물 규묘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는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5만 6천평 정도의 매우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향대청 앞에서 설명을 하시는 해설사를 뒤에 두고 돌아보니

작은 연못이 아름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지당 : 종묘에는 물이 담긴 연못이 세 곳 있다. 사각형의 지당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있는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 사상을 나타낸다. 



내 시선을 따라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늘과 땅의 모양을 한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 심어진 저 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다

대부분 소나무를 심지 않았나 싶어 물어보려던 찰라 시원하게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종묘의 연못은 궁궐과는 그 역할이 좀 다르다. 종묘에 있는 연못은 풍수 지리적으로 부족한 물 기운을 채운다는 의미가 있다. 

종묘 주위에 나무들은 빼곡하게 많지만,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 이 연못으로 물 기운을 채우도록 했다. 

연못 중앙엔 멋들어진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바로 종묘를 대표하는 '향나무'이다. 

보통 궁궐은 소나무를 많이 심지만 종묘는 제를 지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향은 예로부터 정신을 맑게 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이야기가 있어 제사 때 맨 처음 피운다. 

이 향내를 맡고 조상의 혼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여 조상신을 모셔 온다는 영신의 뜻도 담겨져 있다. 

다시 말해, 향나무는 제사를 상징하는 엄숙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당에만 심는 나무라고 보면 된다


비는 다시 세차게 내리고 바지가랭이는 빗물에 튄 모래흙으로 범벅이 되어가고 있었다.



재궁의 어제실 청소중이였다

비오는데.


재궁은 왕과 세자가 머물면서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는 곳이다.




바지가랭이에 모래흙이 튀는 피하며 걸을수는 있었지만 박석이 깔린 이 길을 차마 걷지는 못했다

왜?


신로이기 때문에..

조상신과 임금 세자가 걷는 길이라는 설명에 감히 ...


바지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오른쪽에 보이는 작은 문은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際井)이다.


앞의 네모난 단은 왼쪽이 찬막단이고 오른쪽 작은 단이 성생위라고 한다.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 찬막단이고 종묘제례에는 날음식을 올렸으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둘러 청결하게 하였다고 한다

성생위는 제물인 소, 양, 돼지를 검사하는 곳으로 제물로 올려도 좋다는 판정이 난 후에야 잡아서 썼다고한다.


날음식을 올렸다는 것이 의아했는데 오래전 제를 올렸던 그 방식을 따랐다고 하니 조상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날음식 올리는 제사가 최고의 제사라고...


그럼 제사 음식은 누가 만들었을까?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이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고,

동문은 제례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춤을 주는 일무원 종사원들이 출입을 한다.


동문으로 정전으로 들어갔다.

(제관은 아니지만 임금님의 뒤를 따라 ^^)


가로 109 미터 세로 69 미터의 월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동문 앞의 이것은 판위라고 하는데 왕과 세자가 제례를 할 때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자리다

왼쪽이 전하판위(임금자리) 오른쪽이 세자판위다.




2단의 월대가 정전을 받히고 있다.






출입금지 푯말 앞까지 올라가 정전의 기둥을 보았다.

회랑같은 기둥사이가 차르르르 다가오는 듯 했다.






아래 월대와 위 월대를 연결하는 작은 계단이 3벌이 있다.

가운데 계단(태계)은 조상신을 위한 계단, 동계는 제관이 건물에 오를때 사용는 계단이고 서계는 망료례를 행하기 위해 내려오는 계단이란다.


계단 난간은 구름과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인간들의 세상에서 천상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는 뜻이란다.

계단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옛 사람들의 지혜로움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정전 동문에서 월대로 올라서서 제를 올리기 위해 걷는 임금님이 눈에 선~ 하다.





가로109미터 세로69미터 소우수 2300평의 정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공간

신성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공간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박석이 왜 다듬어지지 않았는지 - 자연을 잠시 이용하다 조용히 떠아냐 하는 초라한 존재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위해 자연그래도 두었다. 자연은 영원하다.

투박한 자연미,,,


월대는 앞쪽으로 약간의 경사를 두고 기울어져 있고 정전의 기둥도 조금씩 다른 모양, 닫힌 문도 약간 틀어지게

닫혀 있음을 주의 깊게 봐 둘 필요가 있다.


정전과 영녕전은 앞부분을 제외한 세 면이 모두 벽돌로 완전히 막혀 있어 내부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다

출입문의 틈새는 조상의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면서 공기가 통하게 해서 내부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는 역활도 한단다.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 와 모시는 건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증축의 표시를 확인 할 수가 있단다.

어떻게 확인을 할까?



정전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이 있고 서쪽에는 칠사당이 있다

공신당은 정전에 모신 역대왕들의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으로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안녕을 위해 사계절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정전 앞 박석을 걷어내고 공신당을 지었다

위계를 낮추려고 그랬단다


덜렁 건물이 있구나 휘 둘러보면 정말 아무 느낌 없이 돌아올 수 밖에 없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고 가면 훨씬 더 의미있는 관람이 될 듯 하다.





신로를 피해 흙길로 걸으니 젖어버린 바지는 기억에도 없어졌다.

정전에서 영년전으로 가는 길






1421년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롬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영녕전이다.


정전보다는 규모가 작고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가운데 4칸은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은데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익조,도조, 환조와 비를 모신곳이다.


조선초기 종묘에는 정전 한채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실이 모자라게 되었으나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는 7신실에 신주를 모시고

제후의 나라 조선은 5신실에 신주를 모시게 되었던 당신의 원칙 때문에 함부로 증축을 할 수 없어 송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지은 곳이 영녕전이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도 비를 흠뻑 맞고 기운을 충전하고 있고

봄비인지 겨울 비인지 오돌오돌 떨며 해설사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운 사람들도 있었다.







사당의 문 위쪽을 저렇게 살도 만든 이유도 있다하니 생각을 해보자

왜 그랬을까?






문살 너머로 보이는 영녕전 월대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이나요?

눈 내리는 듯 하네





건축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양복을 입고 종묘 답사에 나온 두 남자분

해설사에게 끊임없이 건축물에 대한 질문을 해댔다.







나오는 길 신로를 살짝 밟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좀 걷겠습니다.


임금님의 길도 걷고

세자의 길도 걷고,,


비는 멈출 줄 모르고 내리며 체온은 맘껏 내려주고 있었다.


* 신령한 종묘

유성룡이 쓴 기란후사(전란후의 일을 적다)에도 서울에 진입한 일본군이 처음에는 종묘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왜군들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종묘는 신령이 있기 때문에 오래 머물곳이 못 된다'며 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도 종묘를 훼손하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어떤 이유로 그랬을까 내심 궁금해지기는 하다.



중국과 베트남에도 종묘가 있지만 건물 형태만 있을뿐 전통 의식은 사라지고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유교식 제례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우리나라 뿐이라고 하니 오는 5월 6일 열리는

종묘제례를 참관 해보고 싶은 바램이 생겼다.

지루하다는 종묘제례악도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