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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라말쌈이 둥귁에 달라.

하늘위땅 2011. 6. 18. 08:28

나라말쌈이 둥귁에 달라.
한글을 창제하게 된 이유를 세종대왕께서 ‘나랏말쌈이 뒹국에 달라서’였다고 하신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게 되었다. 물론 세종대왕은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을 발명한 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의 조상인 동이족 혈통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고(은허의 발굴은 1910년대에 이루어졌고 은인들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50년대에 이루어짐) 한자는 당연히 상국인 중국의 문자이며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종대왕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전부가 한자는 중국의 문자이고 남의 나라 문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창제문은 조선사람들에게 새 글자의 필요성과 창제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 가장 쉬운 방법일 수 있고, 더 이상의 설명은 대단히 복잡한 여러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이 중국사람의 글과 다르기 때문에 백성들이 글에 뜻을 실어펴는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우리 말과 일치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창제이유가 집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말이 중국의 문자인 한자와 서로 달라서 불편했다면, 중국사람의 말은 중국의 문자라는 한자하고 같아서 쓰기에 편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말이 한자와 다른 것이라면 중국말은 한자와 같은 거냐 이 말이다. 한자라는 문자와 다르기로 치면 조선말이나 중국말이나 왜말이나 그 점에서는 도낑대낑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 말이라는 것은 입을 통해 소리라는 것으로 전달되어진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은 들리는 순간이 지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어서 듣는 순간 이해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되살릴 수가 없다. 보존과 기록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곧바로 소멸되는 정보인 소리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기록수단으로 문자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표음문자이다. 표음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하나의 기호에 대응시킨 것이다. 따라서 표음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입으로 낼 수 있는 소리가 몇 가지나 되는지 구분해야 하고 음소와 음절의 구성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가짓수는 약 200개이지만 히라가나는 고작 50여개 뿐이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라는 소리의 구성요소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음소를 결합하는 문자이지만 히라가나는 거저 소리마다 각기 다른 기호를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말은 소리의 가짓수가 너무나 작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말이 문자에 의해 제한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한자라는 문자는 이런 의미의 문자와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표음문자가 귀에 들린 소리를 기호로 변환하는 것인데 비하여 한자는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눈으로 본 것을 그림으로 변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라틴어, 히라가나와 같은 표음문자가 청각정보의 기록수단인데 반해 한자는 시각정보의 기록수단인 것이다. 눈으로 본것을 무엇을 보았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남기자는 것이 한자라는 상형문자의 본질이고 그것이 바로 표의문자이다. 사람의 말은 개가 짖는 소리나 자연의 소리들과 달라서 미리 약속된 규칙을 갖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미리 정해진 약속이 없으면 사람의 말은 소리가 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청각정보의 특성인데 시각정보는 사전의 약속이 아니라 사후의 약속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누구의 눈에도 닭은 닭이고 소는 소로 보인다. 때문에 시각정보는 사전의 약속이 필요 없다. 닭을 닭과 비슷하게 그려놓으면 이렇게 그린 그림을 닭이라 한다는 사전약속이 없더라도 누구의 눈에도 닭을 그린 그림은 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을 그려놓으면 누가 봐도 눈이라고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상당히 정교하고 복잡하게 그려져야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이런 그림들이 점차로 도안화되는 과정을 그쳐 그림에서 형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표음문자는 소리정보의 기록이고 표의문자는 시각정보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다른 차원의 정보이다.

만약에 사전에 약속된 소리정보를 가지고 닭이라는 짐승을 소리로 설명한다고 하자. 이것은 닭을 말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표현력이 뛰어나고 어휘가 충분하다면 닭에 대한 설명을 들은 사람은 그것이 닭이라는 짐승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닭을 그려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소리정보가 불완전하면 닭이 아니라 오리를 그려서 보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단어와 어휘를 사용해서 설명한 닭이라는 대상은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의 그림이 된다. 도안이 있다면 아주 빠르게 그릴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포함됨을 말한다. 닭의 그림 속에는 닭이라는 짐승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징이 들어있다. 한자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많은 의미와 개념이 복합되어 있는 사물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말로 하면 장황하게 길어질 내용을 함축하고 압축하는 사고의 발달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동양의 뛰어난 정신문화는 한자라는 문자를 사용함으로서 야기된 추상적 사고능력의 배양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근본적으로 시각정보의 기록인 한자는 청각정보인 말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표의문자를 쓴다는 것은 말이라는 청각정보와 글이라는 시각정보의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표음문자만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요구되는 사고능력이 대단히 다른 것이다. 표음문자는 소리와 대응되는 기호의 나열이기 때문에 기호대로 소리를 내면 바로 말이 되고 바로 정보가 재생되지만 표의문자는 그렇지가 않다. 시각정보인 그림을 보고 전혀 다른 정보체계인 소리정보의 형태로 다시 한 번 변환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정보체계로의 번역과정과 같다. 그래서 그림을 소리로, 다시 소리를 그림으로 바꾸는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한 사고활동을 요구한다.

나라말쌈이 둥귁과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말쌈이 한자라는 문자와 다른 것이며, 이것은 중국도 조선과 똑 같은 처지였다. 말쌈이 글자하고 다르기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중국사람들은 자기들 말과 글이 다 자기 것이라서 말과 글이 똑같고 아무나 쉽게 배워 누구나 쓰는 반면에 우리나라만 말쌈이 둥귁에 달라 불편했던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자가 다소 불편하고 익히기 힘든 글자인 이유는 한자가 우리 글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표의문자이기 때문이고 본래 그림으로 시작된 상형문자이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중국사람들도 말과 글이 다른데서 오는 괴로움과 고통은 우리하고 똑 같아서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고, 일본인들은 극히 불편하고 불완전한 방법밖에 안 가지고 있지만 우리 한국사람들은 퍼펙트한, 그야말로 완벽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것이 훈민정음이고 한글이다. 한자와 한글은 본질에서 전혀 다른 두 개의 문자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상보적이다. 표음문자인 한글과 표의문자인 한자의 양자를 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면 문자생활에서는 최고의 경지가 된다. 한국사람은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사람들이며, 사고능력과 사유의 차원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세계에 노니는 으뜸가는 지성인들인 것이다.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는 바로 한자와 한글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 가지 문자의 혼용과 병용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중국은 한글과 같은 뛰어난 표음문자를 가지고 보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불행에 직면해 있다. 즉 말과 글이 서로 다른 체계를 유지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표의문자를 폐기하고 한자를 소리를 적는 기호처럼 사용하거나이다. 근래 중국은 컴퓨터시대를 맞이하여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30년 전 대만이나 홍콩영화에 한자 자막이 나오는 경우 우리는 자막을 보고 대충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중국영화의 한자 자막을 보면 우리는 단 한줄도 못 읽는다. 간자가 표현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소리이기 때문이다. 자막의 한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생소한 기호같은 것도 있는데 어느 쪽이던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뜻하고는 관계없이 그 자리에 쓰이고 있다. 단지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써. 이것이야말로 현대중국의 가장 근본적인 불행이며, 미래 중국 문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척도이며 상대적으로 한글을 갖고 있는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단초가 아닌가 한다.

한글로서 한자를 대체하자고, 또 대체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왜 고마운지 한글이 왜 소중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구름~~
 

출처 : 벽운공
글쓴이 : 겨자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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