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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양학 읽기] 2. 동양학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일보]

하늘위땅 2011. 6. 18. 09:44

[동양학 읽기] 2. 동양학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일보]
 
 
내가 쓴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하는 점은 인터넷이나 보내온 메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독자들이 보내 온 편지에서 가장 많았던 것이 쇼크를 받았다는 고백이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그런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달랐지만, 내가 그 글을 쓸 때 기대했었던 바의 충격이 가해졌다는 점에서 나의 '음모' 가 약간은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뭐냐. 도올 김용옥씨의 고전 강의 내용이 엉터리라는 점에 대한 충격을 받기를 내가 바랬느냐?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무명의 아줌마인 내가 하바드 출신의 대학자보다 더 잘났다는 점에 놀라기를 바랬느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내가 바랐던 충격은 바로 이것이었다. '콜롬부스의 달걀 쇼크' 였다. '고전이라는 것이, 또 고전의 원문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쉬운 것이구나!' 하는 충격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었고 그리고 그 점에서 충분히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나의 책을 읽은 독자들 중 그 책에서 다루지 못한 도덕경의 뒷부분을 혼자서 읽어보겠다고 옥편을 들고 원문의 뜻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려고 덤비게 된 사람들이 많이 생겼음을 나는 안다. 개중에는 자기가 풀이한 도덕경의 번역을 나에게 보내오면서 '맞게 한 것 같으냐' 고 물어 오는 사람도 꽤 있다. 그런 편지를 받을 때 나는 제일 기뻤다.
 
직접 해본 번역이 맞고 틀리고가 문제가 아니다. 남이 한글로 번역하고 풀어놓은 '고전의 번역판' 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진 원문을 들여다보고 그 뜻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동양학의 대중화다.
 
'왜 이해가 안되면서도 기존의 해석서만을 옳은 것이고 최선의 번역 결과라고 믿어 버렸을까' 이런 자책과 함께 '아줌마 이경숙이 하는 데 내가 왜 못하랴' 는 의욕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번역된 결과를 남에게서 듣기만 하는 동양학, 그런데도 이해를 못하는 '죽은 동양학' 에서 자기가 직접 원문을 읽고 뜻을 풀어보는 '살아있는 동양학' , 이것이야말로 내가 『노자를 웃긴 남자』를 쓴 진정한 의도였다.
 
나는 누가 도덕경의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 를 처음으로 '도를 도라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라고 우리말로 번역을 했는지 그 주인공을 알고 싶다.
 
이런 구절들이 우리말로 저렇게 읽히기 시작한 것이 조선시대부터인지, 고려시대부터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논어나 도덕경같은 책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어떻게든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었을 텐데 어떻게 읽었을까?
 
과연 그 옛날부터 고전의 번역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런 내용이었고 그것이 세세토록 내려온 것일까. 아니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다른 뜻으로 읽었는데 그 후에 지금과 같은 것으로 바뀐 것일까.
 
시중에 나와 있는 사서삼경의 주해서들을 비롯해서 고전을 우리말로 옮겨 놓은 대부분의 책에 실려있는 번역문은 그 출처가 의심스러운 것들이다. 그 책을 쓴 저자가 원문을 직접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번역문을 옮겨 실은 것인지부터가 명확치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주해서라는 책들은 원전의 원문을 실어놓고 그 밑에 번역문을 싣고 그 다음에 해설이라는 것을 달아놓은 형태이다. 그런데 어느 책에도 원문의 내용과 번역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에 대한 해명을 하거나 원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번역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 놓은 책은 없다.
 
그저 '이 원문은 이런 뜻이다' 라는 식인데 맨 처음 그런 뜻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는 주장도 없고, 왜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설명해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고전들의 우리말 번역은 어느 사이엔가 정설이라는 것들이 굳어져서 의심받지 않고 통용되어 온 것이다.
 
번역의 근거에 대하여 그나마 설명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 도올 김용옥씨가 처음이다. 도올이 쓴『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은 그만큼 우리 나라의 철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시도였다.
 
그러나 그 시도를 통하여 밝혀진 것은 '지금까지의 고전 번역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를 백일하에 드러나게 만든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이었다. 이것은 도올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도올로서는 기존의 번역에 문법적 설명과 문헌적 근거를 부여하려 했지만, 그것은 검은 것을 희다고 증명하려 한 불가능한 시도였다.
 
도올의 헌신은 마치 중세 아랍의 연금술사들이 쏟은 노력과 마찬가지로 목적의 달성에서는 실패로 끝났지만, 연금술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처럼 도올의 실패는 동양학의 전환점을 불러온 망외의 소득을 거두었다.
 
플라스크와 시험관 속에서 금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던 것과 같이, 고전들에 대한 기존의 번역이 올바르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했던 도올의 노력도 애당초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올의 실패는 기존의 번역들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의 재능과 정열을 해석이 아닌 번역에 쏟았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번역가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나왔으나 그가 한 강의는 누가 보더라도 '해석가' 로서의 해설이었다.
 
도올의 TV 고전 강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전래된 기존의 번역' 과 '도올의 독창적인 해석' 이 뒤섞인 모순과 억지논리의 기막힌 장광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책이었다면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전국민이 보는 TV였던 것이 도올의 불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나라의 동양학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도올로 해서 동양학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동양학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저자

출처 : 벽운공
글쓴이 : 겨자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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