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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양학 읽기] 1. 고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중앙일보]

하늘위땅 2011. 6. 18. 09:44

[동양학 읽기] 1. 고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중앙일보]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된 『노자를 웃긴 남자』(자인)
의 저자 이경숙씨가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중앙일보에 동양학 읽기에 관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도올 김용옥의 도덕경 번역을 매섭고 설득력있게 비판해 관심을 끈 이씨는 이 칼럼을 통해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양 삼교(三敎)
를 중심으로 동양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펼쳐보일 예정입니다.
 
아울러 “고전은 어렵지 않다”는 지론을 펼쳐온 이씨는 연재과정에서 자신의 공부과정을 포함하여 한문독법에 대한 견해 등 독자들의 궁금증도 밝히겠다고 말했읍니다.
 
이씨의 견해에 대한 반론은 물론 환영합니다.다양한 해석이 오고가는 가운데 성숙한 토론문화가 형성되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동양의 고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쉽고,재미있고,유익하기 때문이다.고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질구나 성현의 말씀이여,쉽구나 그 가르침이여.’이런 고전을 읽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데 결코 외국 명문대의 유학 경력이나 박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물론 이 말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음도 잘 안다.
 
중국 ·인도 ·한국의 3천년이 넘는 역사 동안 남겨진 정신적 유산이 어찌 방대하지 않으랴마는 그것을 크게 구분하면 세 개의 철학과 세 개의 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
 
세 개의 철학이란 유불선(儒佛仙)
의 삼교(三敎)
요,세 개의 과학이란 주역(周易)
을 대표로 하는 역학(易學)
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과 풍수학(風水學)
의 삼학(三學)
이다.
 
물론 삼교삼학(三敎三學)
이 담고 있는 학문적 깊이는 실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이중 주역은 서양의 천문학에,음양오행설은 물리학에,풍수지리는 지리기상학에 비견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이어서 ‘삶의 지혜나 생활의 덕목 또는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문적인 철학으로 논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따라서 앞으로 연재할 것은 유불선 삼교의 인문 철학적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 철학이 일반인들에게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언외(言外)
에 속하는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동양철학의 특성이기도 하다.
 
인간의 언어로는 전달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못박고 나오는 개념들이다.불교의 깨달음이나 유교의 천명(天命)
이나 도교의 선경(仙境)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 삼교(三敎)
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보면 불교는 ‘해탈성불(解脫成佛)
’이요,유교는 ‘입신양명(立身揚名)
’이고,도교는 ‘우화등선(羽化登仙)
’이다.이런 목표의 지향점에서 볼 때 유교는 현세지향적이고,불교는 내세지향적이며, 도교는 탈인간지향적 교설이다.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에서도 삼교의 차이는 두드러진다.불교는 마음(心,佛)
하나를 붙잡고,도교는 몸(身,仙)
에 의지하며,유교는 이름(命,名)
에 매달린다.
 
따라서 형상 없는 마음을 바루는 불교가 가장 어렵고,몸을 수련하는 도교가 다음이고,이름을 세우는 유교가 가장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궁극적인 경지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넘겨다보기 어려운 높은 산이며 구름에 쌓인 그 꼭대기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 삼교(三敎)
가 공히 언외(言外)
의 것만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바로 이 것이다.동양고전에는 전문적이고 고도로 훈련된 식자나 내부적인 전승자들이 아닌 일반인들 모두가 쉽게 배울 수 있는 메시지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이런 것들이 기록된 옛 책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말한다.
 
실제로 옛날에는 이런 고전들을 배우고 익히는데 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서당의 어린 학동들과 나라를 경영하는 원로 대신들이 같은 고전을 읽고 공부했다.논어는 대학이나 대학원생들을 위한 교재가 아니라 초등학생들부터 대학교수들까지 같이 보는 교재였다는 얘기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이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이라’든가,‘유붕(有朋)
이 자원방래(自遠方來)
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
라’하는 구절은 어느 시골의 서당에서나 들을 수 있었으며,촌부들도 어린 손자들에게 일러주던 말들이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같은 노자의 글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동양의 고전들을 세계 유수의 명문대를 거치고 수십 년간의 피눈물 나는 연구의 노력이 있어야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아니 그러함에도 보다시피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고 역설하는 도올의 고전 강의에 대한 반론으로 쓰게 된 것이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이었다.
 
컴퓨터통신 모임방에서 그 글을 연재한 것은 이발사가 숲 속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그 소리를 바람이 전하고 나뭇잎이 대답하듯이 퍼져나간 끝에 책으로까지 출판되었다.
 
허나 귀가 당나귀 귀면 어떻고,옷이야 벗었으면 어떠하랴.도올이 아니면 이 방황의 세기,탐욕과 환락과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전차가 질주하는 이 시대에 누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노자와 공자의 가르침에 쏠리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방송국도 놀랐고,학계도 놀랐고,민초들도 놀랐다.도올로 해서 바야흐로 ‘철학의 대중화’시대가 열린 듯이 보였다.
 
그러나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내가 본 것은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철학의 귀족화요,엘리트화였다.동양의 고전이라는 것이 저렇게 어렵고 난해하고 일반인들은 함부로 접근하기조차 힘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동양에서의 학문이란 ‘옛 성현의 말씀을 익히고 깨쳐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공부라는 것은 ‘공자왈 맹자왈’이었고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문자의 숙지였다.그런 고전이 오늘날에는 명문대를 나오고 수십 년간의 연구 노력을 한 학자나 교수가 아니면 읽을 수 없는 고급 학문이 되어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독점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한글 전용 교육이 시행된 결과로 한자의 해독이 ‘특별한 능력’이 되어 버린 탓에 ‘모든 사람들의 학문’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수의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인문학의 위기는 한자 교육의 철폐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전통적 학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고전들이 명문대학을 거친 교수나 학자 아니면 읽을 수 없는 것이 되고,전문가들이 주석을 달고 해석을 해 놓은 한글판이라는 것들이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을 때 동양학이 설 땅이 있겠으며 인문학의 꽃이 어디에서 피겠는가.
 
‘고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아줌마도 옥편 한 권 들고 앉으면 고전의 원문을 읽어나갈 수 있다’‘동양 철학이 그렇게 난해한 말들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칼럼의 목적이다.
 
다음 회부터는 대표적인 두 고전 논어와 도덕경을 같이 보면서,그리고 유사한 부분에서 불교의 논지를 곁들여 고전을 읽는 방법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물론 고전을 읽는 즐거움도 같이 만끽하였으면 한다.
 
이경숙 <노자를 웃긴 남자>
저자

출처 : 벽운공
글쓴이 : 겨자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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